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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걸 역사이야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꿍꿍이 속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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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작성일19-11-0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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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이준걸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호학(好學)은 천성적이며 그 사고 또한 영특하여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대단했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기다릴 것 없이 도요토미 사후에는 천하를 장악하는 주인공의 향방을 간파하였다. 도쿠가와는 유학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인간혁명의 철학과 무장으로서 처세술, 여론과 민심의 동향파악, 인사 및 용인술에 뛰어났고, '비록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잡았으나 문(文)에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는 인재등용에 정성드려 찾아낸 후지하라 세이가(藤原惺窩)는 몰락한 호족의 아들로서 교토의 불교 총본산의 소고쿠지(相國寺)의 승려 순수좌(舜首座)로, 1590년 조선통신사의 종사관 허성(후에 이조판서)을 만나 "불교 교의에 인의(仁義)가 없으나 유학에는 인도(人道)의 극치, 도덕의 지선(至善)을 이룬다"는 설명에 감동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 약탈본의 유서(儒書)를 읽고, 이 퇴계의 사상에 심취되었다. 그리고 정유재란때 포로로 잡힌 강항과 교제하면서 그의 유학관에 끌려 강항에게 '사서오경'등 20여종의 고전을 필사케하여 돈 많은 성주(城主)에게 팔아 목선을 마련해 2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후지하라는 선승(禪僧)에서 전향하여 불문을 나와 도쿠가와 앞에 나타나 유학자의 신분으로 5산의 노학승과 유불논쟁을 벌인 바도 있다. 도쿠가와는 그의 인재됨을 알고 1593년 왜경에다 집을 지어주고 매년 쌀 2천석을 줄테니 '정관정요(貞觀政要)'의 강의를 부탁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유학자로 남아 학문에만 매진하여 일본주자학사(史)상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후지하라가 유학자로 개종했기 때문에 하야시 라잔이 제자가 되었고, 또한 선림(禪林)에서 이탈하여 유문(儒門)으로 들어왔으며 그리고 그의 천거로 막부의 요직에서 종사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일본 근세 유학사조의 흐름을 돌려 놓은것도 임진왜란 때 약탈본으로 학문적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하야시 라잔이 1604년(22세) 조선정사(正使) 손문욱 측과 강화조약을 맺을 때 참여했고, 임진왜란 후 12회의 통신사 왕래에 1회(1607년, 25세)부터 6회(1655년, 73세)까지 접대를 맡았다. 조선에서 약탈한 도서를 관리한 수루가문고의 책임자로, 그의 4세 후손들까지 유관(儒官)으로 종사하며 유학이 막부의 관학으로 시행케 만든 장본인들이다.

  도쿠가와의 유훈을 바탕으로 그 후손과 후지하라에 사사(師事)한 하야시 라잔의 좌우명을 모아 편찬한 '훈계'를 실천하며 유도(儒道) 흥행에 적극성을 띄어 막부 경영의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에 많은 효과를 연출했다.

  현대 일본에 있어서 문운(文運)의 좌표는 메이지의 문교에서 기준을 찾아야 되고, 메이지 문세(文勢)의 바탕은 도쿠가와 265년의 교화에서 이루어졌으며, 도쿠가와 문덕(文德)의 연원은 조선인사의 접촉과 조선서적의 전래로 유불경전(經典)을 독본으로 하여 연구를 증진한데 기인한다. 글이란 본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이다.

  도쿠가와에 대한 일화에 도요토미가 "나는 명장(名匠)의 보검을 비롯해 천하 보물을 많이 갖고 있는 데 여러분은 어떤가? 하니 다이묘들은 각자의 진귀한 명보(名寶)를 자랑하는데 도쿠가와는 벽촌 출신이라 귀한 물건은 아예 없고, 다만 나에게는 생사를 같이 할 사람 5백기(騎)정도가 있어 이것이 나에게는 제일가는 보물"이라고 했다.

  천하를 통일한 세 사람을 빗대 소쩍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려라'는 오다 노부나카와 '울게 하라'는 도요토미 그리고 '울 때까지 기다려라'는 도쿠가와의 참을성을 견줘봤고, 세 사람의 통치 유형을 빗대 노부나가가 떡을 치고, 히데요시가 반죽한 천하의 떡을 편안히 앉아서 먹는 것이 도쿠가와라고 비유하며 '너구리 첨지'라고도 애칭했다.

  아무튼 교육은 혼과 혼의 만남이라는데 조선 선비의 저술본을 일본 지식인들이 열심히 읽었으니 혼의 의기투합으로 15대 장군 265년간이나 조선과 역사상으로 가장 화려한 우호적 교린을 유지했다.  <끝>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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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